한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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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강의 기적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초토화되었던 대한민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이룬 경제 성장을 의미한다. 1960년대 초 서독의 경제 성장을 칭찬하며 사용된 "라인강의 기적"에서 유래된 용어로, 장면 국무총리가 "한강변의 기적"을 언급하고,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연설을 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한국은 자원 부족이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제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발전시키고, 미국의 지원, 파독 광부 및 간호사 파견, 한일 국교 정상화를 통한 일본 자금 유치, 베트남 전쟁 참전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며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 수출 주도형 산업 정책, 중화학 공업 육성, 새마을 운동 등 다양한 정책들이 추진되었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베트남 전쟁 참전, 서독 파견, 한일 국교 정상화 등의 주요 사건들이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재벌의 역할과 문제점, 북한과의 경제 격차, 긍정적 평가와 논란 등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받고 있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박정희 시대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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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교역 정책은 서구 열강과의 통상, 식민지 시대, 경제 개발, 수출 주도 정책, 자유 무역 협정 등을 거치며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WTO 회원국으로서 자유 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개방 경제 체제를 지향한다. - 베트남 전쟁의 여파 - 라이따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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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의 기적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이 이룩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지칭하며,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경제 장관의 정책, 마셜 플랜 지원, 숙련된 노동력 확보 등의 요인으로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 현상을 의미한다.
한강의 기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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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한국어 표기 | 한강의 기적 |
한자 표기 | 漢江의 奇蹟 |
로마자 표기 (문화관광부 2000년식) | Hangangui gijeok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 Han'gangŭi kijŏk |
영어 표기 | Miracle on the Han Ri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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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 | |
주요 사건 | 5개년 경제 개발 계획 새마을 운동 중화학공업 추진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
관련 사건 | 서울 올림픽 |
경제 구조 | |
주요 특징 | 재벌 중심 경제 무역 정책 |
주요 산업 | |
핵심 산업 | 통화 통신 관광 교통 금융 에너지 |
지역별 경제 | |
지역별 1인당 국내 총생산 | 지역별 GDP |
특별시 경제 | 서울 |
관련 주제 | |
기술 및 사회 | 과학 기술 도시 |
기타 정보 | |
관련 용어 | 한강의 기적 |
참고 자료 | 포브스, "한국의 기적: 재벌의 미래 과제" 스탠포드 대학교, "한국 경제에서 재벌의 역할 변화" CNET, "재벌: 한국의 거대 복합 기업의 성장" 코리아 헤럴드, "한국의 기적, 70년의 역사" |
경제 지표 | |
영아 사망률 | 세계은행 자료 |
아동 사망률 | Our World in Data 자료 |
2. 배경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민국은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있었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에 걸쳐 일본 자본 투자의 결과로, 한국은 어느 정도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17][18] 그러나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이 한국을 경제적으로 착취함에 따라 한국 경제는 쇠퇴하였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 개발을 내세워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국내총생산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계획경제를 추진하던 북한이 앞서고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은 5개년 계획 방식의 계획경제를 도입했다. 이는 쿠데타 이전 장면 내각이 이미 계획했던 것이었다. 한국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고 1인당 국민소득이 빈국 수준이었던 한국 경제는, 미국의 무상 원조와 베트남 전쟁 특수, 서구 여러 나라의 융자,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을 계기로 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및 기술 원조에 힘입어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25]
이후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타게 되면서 경제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26][27]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1980년에는 일시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겪기도 했지만, 1981년 이후 급속히 회복되었다.[45]
급속한 경제 성장의 요인으로는 정부 주도의 "5개년 개발 계획"과 새마을 운동, 재벌 중심의 기업 경제 발전 등이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일본과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및 기술 원조, 시장 개방, 제조업 발전, 산업 구조 조정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2. 1. 시대적 상황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한국 경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하며 적화통일을 노렸고, 한국은 사실상 섬나라와 같아 외국 투자를 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이 주둔하면서 안보 위협이 완화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54]냉전 시기, 한국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에 속했고,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원조를 받았다.[54]
2. 2. 자원 부족
한국은 지하자원이 적어 석유를 팔아 부를 축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상동광산에서 생산된 텅스텐을 미국에 수출했다.하지만 이러한 자원 부족은 역설적으로 한국이 1차 산업 대신 2차 산업, 즉 제조업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제조업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자원의 저주에 빠진 다른 개발도상국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2. 3. "한강의 기적" 용어의 유래
1960년대 초,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서독의 놀라운 전후 경제 성장을 가리키는 "라인강의 기적"을 칭찬했다.[14][15]1961년 신년사에서 장면 제2공화국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유사한 경제적 호황을 달성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한강변의 기적"(한강변의 기적|hangangbyeon-ui gijeok한국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14]
3. 역사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한국은 1인당 GDP가 67달러에 불과한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고 초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며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연평균 4.4%의 경제 성장을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높은 수준이었다.[54]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박정희 시기가 평균 성장률 8.5%의 고도성장 시대였지만, 경제 성장의 폭과 깊이가 불안정했고 외환보유액이 부족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55] 5·16 군사 정변부터 1979년까지 한국은 여러 차례 외환위기와 부도위기를 겪었고, 1961년부터 1979년까지 74분기 중 14분기(19%)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56]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한독근로자채용협정에 의한 파독광부와 파독 간호사 파견, 중동 건설 붐 등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고 경제 성장을 이어갔다.[57] 1960년에는 74개 개발도상국 중 사회, 문화 복합지표 15위를 차지하는 등 양질의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내수 시장도 꾸준히 발전했다.[57] 이후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으며, 이 시기 전문가들은 시멘트, 비료, 자동차, 가전, 철강 등에 대한 수입대체전략과 면방직, 노동집약 건설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주도전략이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한국 전쟁 이후에도 지속된 미국의 원조와 베트남 전쟁 특수,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한 일본의 차관 및 기술 원조를 바탕으로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25] 특히 서울 강남 지역과 여의도가 크게 개발되었다.
1973년 1월, 박정희는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 육성, 수출 증대, 농수산 분야 투자를 통한 도농 격차 해소를 강조했다. 그는 "80년대의 수출 목표를 약 100억 달러까지 올려보자"라며, 농촌 개발과 농업 진흥을 위해 수출 증대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65][66][67]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타면서 경제 성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26][27]
1979년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1980년에는 일시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1981년 이후 빠르게 회복되었다.[45]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이전까지 높은 경제 성장을 지속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당시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60억달러에 불과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노력과 시민들의 참여,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통해 위기를 극복했다.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제2의 한강의 기적" 창조를 내걸었지만,[28] 2017년 대통령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3. 1. 제1공화국과 한국전쟁 (1948-1960)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한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북한의 지속적인 적화통일 위협으로 외국 투자 유치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주한미군이 주둔하면서 안보가 강화되었고, 미국과 일본의 투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54]냉전 시기, 한국은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자본주의를 선택하고 미국의 원조를 받았다.[54] 1953년 휴전 이후, 한국은 1인당 GDP가 67달러에 불과했지만, 수입대체산업 육성에 힘쓰며 경제성장률보다는 초인플레이션 해결에 집중했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연평균 4.4% 성장했는데, 이는 당시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높은 수준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을 수립하고 주로 농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를 가졌다.[15] 1950년 토지개혁법을 통해 주한미군정은 일본 소유 토지를 재분배하여 민간 자금을 조성했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했다. 1957년을 기점으로 미국의 원조 정책이 바뀌면서 한국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은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62년)을 수립했지만, 4·19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19]
3. 2. 제2공화국 (1960-1961)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단 1년간 존속했지만, 이념과 정책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면 총리와 민주당은 극단적인 반공주의 입장을 취했지만, 국가 주도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경제 우선 정책을 주장하며 일본과의 친선 및 경제 협력을 증진시켰다.[20]장면 정권은 경제 재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을 수립했지만,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3. 3. 군사정부 (1961-1963)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박정희 정부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한국 전쟁 이후에도 지속된 미국의 원조와 베트남 전쟁 특수,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한 일본의 차관 및 기술 원조를 바탕으로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경제 발전을 추진했다.[25]박정희 정부는 최고회의(Supreme Council for National Reconstruction, SCNR)를 수립하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시행했다.[21] 이 계획은 농업, 에너지 산업, 기간산업, 사회간접자본 확충, 고용 증대, 수출 증진, 과학 기술 진흥 등을 통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21] 비록 이 계획이 즉각적인 자립 경제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장기적인 경제 성장과 현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1]
장면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66년)은 5·16 군사 쿠데타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지만, 박정희는 민생고 해결과 자립 경제 기반 확립을 위해 이를 수정하여 추진했다. 초기에는 국내 자본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 건설을 추진했다.[21]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군사 원조를 받았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 전후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한진그룹,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신흥 재벌이 형성되었으며,[31] 정부는 이들에게 독점 거래권을 부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으로 서울 대도시권으로 인구와 산업이 집중되면서 프라이메이트 시티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긍정적인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박정희 시기가 고도성장 시대였지만, 경제 성장의 폭과 깊이가 불안정했고 외환보유액이 부족한 상황이었다고 지적했다.[55] 또한, 박정희 집권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외환위기와 부도위기를 겪었고, 1961년부터 1979년까지 74분기 중 14분기(19%)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56]
3. 4. 제3공화국 (1963-1972)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 개발을 내세워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당시 국내총생산은 북한이 앞서고 있었기에, 박정희 정권은 5개년 계획 방식의 계획경제를 도입했다. 한국 전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빈국 수준이었던 한국 경제는, 베트남 전쟁 특수와 한일 기본 조약을 계기로 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및 기술 원조에 힘입어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25]박정희 정부는 수출 주도형 경제 정책을 추진하고,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전환했다.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한독근로자채용협정에 의한 파독광부와 파독 간호사 파견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였다.[57] 또한, 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으로부터 재산권 청구에 대한 배상금으로 8억달러를 받았다.[10][22] 정부는 이 자금을 사용하여 자립 경제를 달성하고, 농촌 지역 개발을 위해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는 계획 수정이라는 난관에 봉착했지만,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 건설의 길을 선택했다. 1966년 박정희-존슨 회담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대가로 거액의 경제·군사 원조가 약속되었다. 그 액수는 파병 후 5년간 약 17억달러에 달했다. 같은 해 브라운 각서에서는 추가 파병 시 베트남에서 시행되는 각종 구호 및 건설 사업에 한국 기업을 참여시키고, 한국에 추가로 미국 국제개발처 차관(AID loans)을 제공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1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연평균 10% 전후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진그룹과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신흥 재벌이 형성되었다.[31] 이들 한국 재벌에게 한국 정부는 독점 거래권을 부여하는 등 지원을 했다.
대한항공이 민영화되었고,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가 건설되었다.[30] 한국 경제는 급성장을 거듭하며, 국력으로 북한을 앞지르고 국민소득을 10배로 늘린다는 공약을 목표보다 3년 앞서 달성했다.
3. 5. 제4공화국 (1972-1981)
제4공화국 시대에는 정부의 지원 아래 중공업이 호황을 누리며 전자 및 철강 산업이 번성했다. 정부는 사업 운영을 지속적으로 지원했기에, 산업계 지도자들은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었다. 중공업에 대한 소비자 신뢰가 높아짐에 따라 경제에 많은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10]1973년 1월, 박정희는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 공업 육성, 수출 증대, 농수산 분야 투자를 통한 도농 격차 해소를 강조했다. 그는 "80년대의 수출 목표를 약 100억 달러까지 올려보자"라며, 농촌 개발과 농업 진흥을 위해 수출 증대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또한 새마을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중소 공장 설립과 4대강 유역 개발, 항만 개발, 도로망 확충, 고속도로 건설 등을 통해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천명했다.[65][66][67]
3. 6. 시장 구조조정 (1981-1997)
1996년 12월경,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인정받았다고 발표했다.[55] 그러나 정치 및 금융 시스템 내에는 여전히 체계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56] 한국은 금융 부문을 구조조정하고 더욱 투명하고 시장 지향적이며 감독이 잘되는 시스템으로 만들라는 압력을 받으면서, 한국 기업들은 국제 기구의 감사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다.[57]3. 7. IMF 외환위기 (1997-1999)
1997년 한국은 아시아 외환 위기라는 전면적인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당시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60억달러에 불과했으며, 그 대부분이 차기 정부의 예산으로 배정되어 있었다.[10] 30년 만에 처음으로 군 출신이 아닌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경제를 지켜내지 못했고, 김대중 대통령(1998~2003)이 IMF 경제위기 상태에서 취임하여 상당한 피해를 복구해야 했다. 새 대통령은 당시 재벌과 금융 및 정부 시스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그의 당선과 시민들의 노력, 그리고 국제통화기금이 마련한 580억달러의 지원을 통해 한국은 부채를 상환하고 위기를 극복했다. 따라서 한국의 금융 위기는 심각했지만, 유사한 상황을 경험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다.4. 경제 정책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군사정부 수립 후,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을 시작했다. 1차 5개년 계획(1962~1966)은 농업, 에너지 산업 확장, 기간산업 개발 등을 목표로 했으며,[21] 장기적인 경제 성장과 정책 개혁의 기반을 마련했다.[21]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부는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년-66년)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국내 자본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았다.[10][22] 1964년 계획 수정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 건설을 선택했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대에는 정부의 지원 아래 중공업이 호황을 누리며 전자 및 철강 산업이 번성했다.[10]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는 농촌과 농업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여 농업 구조 혁신을 꾀했다. 1973년 연설에서도 농촌 개발과 농업 진흥을 위한 수출 증대를 강조했다.[67]
4. 1. 경제 개발 계획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이끄는 군사 쿠데타로 군사정부가 수립된 후, 한국은 한강의 기적의 핵심 요소인 5개년 경제 개발 계획을 시작했다. 1차 5개년 계획(1962~1966)은 농업, 에너지 산업 확장, 기간산업 개발, 사회간접자본 확충, 고용 증대, 토지 보전 및 이용, 수출 증진, 과학 기술 진흥을 통해 국가 경제 발전을 목표로 했다.[21] 비록 즉각적인 자립 경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장기적인 경제 성장과 정책 개혁의 기반을 마련했다.[21]한국 전쟁 이후 한국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지만, 미국의 원조 정책 변화로 1957년부터 원조가 감소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은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62년)을 수립했지만, 4·19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되었다. 장면 정권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66년)을 수립했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실행되지 못했다.
박정희는 민생 문제 해결과 자립 경제 기반 확립을 위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년-66년)을 새롭게 추진했다. 국내 자본 동원을 위해 노력했지만, 1964년 계획 수정이라는 난관에 부딪혔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 건설을 선택했고,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1966년 박정희-존슨 회담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약 17억달러의 경제·군사 원조가 약속되었다. 같은 해 브라운 각서에서는 추가 파병 시 베트남에서 시행되는 각종 사업에 한국 기업을 참여시키고, 한국에 추가로 미국 국제개발처 차관(AID loans)을 제공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10년 동안 한국 경제 성장률은 연평균 10% 전후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진그룹,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신흥 재벌이 형성되었다.[31] 한국 정부는 이들 재벌에게 독점 거래권을 부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새마을운동 등을 통해 농촌 활성화를 추진했지만, 도시로의 인구 집중과 산업 구조 측면에서 불균형적인 발전이 나타났다.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개인 보상금 사용 내역을 공개하지 않아[29]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대한항공이 민영화되었고,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가 건설되었다.[30] 한국 경제는 급성장하여 국력으로 북한을 앞지르고 국민소득을 10배로 늘린다는 공약을 조기에 달성했다. 이 정책으로 서울특별시 대도시권으로 인구와 산업이 집중되면서 프라이메이트 시티 현상이 나타났다.
4. 2. 수출 주도형 산업 정책
박정희 정부는 군사 쿠데타 이후 민생 안정과 자립 경제 기반 확립을 위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2년-66년)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국내 자본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았다.[10][22]1964년 계획 수정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 건설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국제적 신용을 확보하지 못했던 한국은 동맹국인 미국에 외자를 요청했고, 그 창구로 일본이 선택되어 한일 기본 조약에 따라 국교를 정상화했다. 1966년 박정희-존슨 회담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대가로 거액의 경제·군사 원조가 약속되었다. 그 액수는 파병 후 5년간 약 17억달러에 달했다. 같은 해 브라운 각서에서는 추가 파병 시 베트남에서 시행되는 각종 구호 및 건설 사업에 한국 기업을 참여시키고, 한국에 추가로 미국 국제개발처 차관(AID loans)을 제공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1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연평균 10% 전후였다.
미국은 파병된 한국군에게 전투 수당을 지급하고, 한국 상품의 미국 수입 규제를 완화했으며, 군사 원조를 제공하여 한국 경제 성장을 지원했다. 이러한 "베트남 특수"는 10억달러를 상회했다.[31]
이러한 외자 유치 및 미국의 지원은 한진그룹,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신흥 재벌 성장의 기반이 되었으며,[31] 대한항공 민영화,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건설 등 주요 사업 추진의 동력이 되었다.[30] 한국 경제는 급성장하여 북한을 앞지르고 국민소득을 10배로 늘린다는 목표를 조기에 달성했다.
4. 3. 중화학 공업 육성
제4공화국 시대에는 정부의 지원 아래 중공업이 호황을 누리며 전자 및 철강 산업이 번성했다. 정부 지원은 산업계 지도자들이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게 하였고, 중공업에 대한 소비자 신뢰가 높아짐에 따라 경제에 자금이 유입되었다.[10]4. 4. 새마을 운동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는 농촌과 농업에 많은 자원을 투자하여 농업 구조 혁신을 꾀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박정희의 주도 아래 적극적인 농업 육성책을 펼쳤으며, 그 일환으로 4대강 유역 종합개발, 통일벼 보급, 복합영농화, 새마을운동 등을 실시하였다.[65][66] 1973년 1월 연설에서도 농촌 개발과 농업 진흥을 위한 수출 증대를 강조했다.[67]박정희는 "우리가 고도 성장을 계속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중화학 공업을 앞으로 중점적으로 육성발전시켜 나가야 하겠고, 수출 산업을 더욱 확충해서 수출의 지속적인 신장을 기해야 하겠고, 농수산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서 도농간의 격차를 해소하는 데 정부는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 농어촌에도 새마을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중소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농어민들의 소득 증대에 크게 이바지하게 하여, 우리 농촌도 도시 못지 않게 살기 좋은 농촌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67]
5. 주요 사건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외자 유치에 힘썼다. 낮은 국제 신용으로 인해 동맹국인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10][22]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차관 3억 달러 이상(당시 1달러=약 360엔, 현재 가치 약 4.5조엔)의 자금을 지원받았다.[38] 이는 당시 한국 국가 예산의 약 8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 자금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주요 인프라 개발[39]과 포항종합제철 설립 등 기업 투자에 사용되었다.[40][41]
1966년 박정희-존슨 회담과 브라운 각서를 통해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상당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약속받았다. 파병 후 5년간 약 17억달러에 달하는 지원이 이루어졌고, 한국 기업의 베트남 구호 및 건설 사업 참여, 미국 국제개발처 차관(AID loans) 제공 등이 추가로 약속되었다.[31]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 안팎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서독은 마셜 플랜과 한국 전쟁 특수 등으로 "기적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노동력이 부족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3년부터 한국에서 광부(파독광부)와 간호사(파독간호사)를 받아들였다.[32] 파독 노동자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달러에 달했고, 한때 GNP의 2%대에 이르렀다.[36]
5. 1. 경부고속도로 건설
5.16 군사정변 이후 국토건설종합계획법(1963년 10월 14일)으로 국토종합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62]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수송난이 심각해졌으나 박정희 정부는 철도 중심의 개발을 추진하면서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졌다. 그럼에도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철도 예산이 도로 예산의 3.5배에 달했고,[63] 철도보다 고속국도가 훨씬 미래성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64] 1967년 토지계획기본구상이 수정, 보완되어 대국토건설계획서(안)이 되었고, 고속도로 10개년계획(1970) 등 여러 고속국도 계획서에 서울-인천 간 6차선, 서울-수원 간 4차선 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포함되면서 고속도로 건설이 최초로 정부 문서에 명문화되었다. 이후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여러 도로가 우선순위 경쟁을 거쳐 건설되었다.
5. 2. 베트남 전쟁 참전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외자 유치에 힘썼다. 당시 한국은 국제적 신용이 낮았기 때문에 동맹국인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과정에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10][22] 1966년 박정희-존슨 회담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상당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약속받았다. 파병 후 5년간 약 17억달러에 달하는 지원이 이루어졌다.[31] 같은 해 브라운 각서를 통해 한국 기업의 베트남 구호 및 건설 사업 참여, 미국 국제개발처 차관(AID loans) 제공 등이 추가로 약속되었다.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 경제는 연평균 10% 안팎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진그룹,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신흥 재벌들이 이 시기에 크게 성장했으며,[31] 정부는 이들에게 독점 거래권을 부여하는 등 특혜를 제공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 참전을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동원은 회고록에서 "박 대통령의 베트남 참전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은 성공적인 전략"이었으며, "특히 경제적 실리는 엄청난 성과"였다고 회고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기존의 정설과는 달리 한국이 미국에 먼저 파병을 제안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31] 베트남으로 간 한국인 군인과 노동자들은 높은 임금을 받으며 "베트남 벼락부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31]
박근호 시즈오카 대학교 교수는 한국 전쟁 특수로 경제 부흥을 이룬 일본의 사례를 박정희 정권이 따랐다고 지적하며,[31] 베트남은 한국인들에게 전쟁터가 아닌 시장이었다고 평가했다.
5. 3. 서독으로의 노동자 파견 (파독 광부와 간호사)
서독은 마셜 플랜과 한국 전쟁 특수 등으로 "기적의 경제"라 불리는 급성장을 이룩했지만, 노동력이 부족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3년부터 한국에서 광부(파독광부)와 간호사(파독간호사)를 받아들였다.[32] 1963년 제1차 파견에는 500명 모집에 4만 6000명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1963년부터 1978년까지 7만 9000명의 광부가 파독되었고, 이 중 탄광 노동자는 7983명이었다. 간호사는 1966년부터 1976년 사이에 1만 명이 넘게 서독으로 갔다.[33][34]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부부는 루르 탄광 지대 함보른 광산을 방문하여 파독 한국인들을 위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을 떠나 낯선 이국 땅에서 고생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이 먼 이국 땅에 왔는지 명심하고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 비록 우리 세대에 이루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번영의 기반을 쌓아야 한다"라며 눈물로 격려 연설을 했다.[35]
파독 노동자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달러에 달했고, 한때 GNP의 2%대에 이르렀다.[36] 1967년에는 수출 총액의 36%를 차지했으며, 독일로부터 차관을 얻는 등 외화 획득에 기여하여 한국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37]
5. 4. 한일 국교 정상화와 일본 자금
1965년 한일 기본 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차관 3억 달러 이상(당시 1달러=약 360엔, 현재 가치 약 4.5조엔)의 자금을 지원받았다.[38] 이는 당시 한국 국가 예산의 약 8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일본국제협력단(JICA)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총 6,000억 엔의 엔화 차관이 제공되었다.[38]한국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 주요 인프라 개발[39]과 포항종합제철 설립 등 기업 투자에 사용했다.[40][41] 이후 일본 민간 기업의 대규모 투자가 이어졌다.[30]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2000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이 청구권 자금을 지급한 한국,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5개국 중 한국이 가장 효율적으로 자금을 사용했다고 분석했다.[46]
2021년 6월 7일,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강제징용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른 일본의 지원이 "한강의 기적"에 기여했다고 판결했다.[51]
하지만, 일본의 대규모 경제·기술 지원이 한국 발전에 기여한 사실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42][43] 2005년 한일 기본 조약 관련 문서 공개 이후, 박정희 정부의 결정에 대해 "빈곤 탈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평가와 "식민지배 청산을 포기한 굴욕 외교"라는 비판이 엇갈리고 있다.[44]
6. 재벌의 역할과 문제점
재벌은 가족이 운영하는 한국의 기업 집단으로, 독과점 또는 과점적 지배력을 행사한다.[23]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 시대에 재벌의 성장을 지원하여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 재벌 그룹 내에는 가족 구성원이 관리하고 운영하는 많은 계열사들이 있으며, 이들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기도 한다.
George E. Ogle에 따르면, 10개의 재벌 가문이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 경제 성장의 60%를 담당했다.[23] 정부와 협회의 도움으로 재벌들은 한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는 소규모 기업을 지원하려 했지만, 재벌의 확장을 막지는 못했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 정책 전환으로 1957년부터 원조가 감소하여 한국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은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했지만 4·19 혁명으로 붕괴되었고, 장면 정권의 경제 개발 계획도 5·16 군사 정변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박정희는 외자 유치를 통한 경제 건설을 추진했고,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베트남 전쟁 파병 대가로 경제 원조를 받았으며, 이를 통해 한진그룹,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신흥 재벌이 형성되었다.[31] 정부는 이들 재벌에게 독점 거래권을 부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재벌 중심의 경제 성장은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 비윤리적인 행위와 부패한 관행으로 소규모 기업이나 독립적인 기업가 정신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23] 새마을운동등을 통해 농촌 활성화를 추진했지만, 도시로의 인구 집중과 산업 구조 측면에서 경제 성장으로부터 농촌과 중소기업이 소외되는 등 불균형적인 발전을 초래했다.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개인 보상금 사용 내역을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아[29]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7. 북한과의 경제 격차
북한은 1953년 이후 중화학공업 중심의 계획경제를 추진하여 1960년까지 연평균 20%의 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1957년부터 10여 년간 일시적으로 대한민국의 1인당 국내 총생산을 추월하기도 했다.[59] 그러나 장면 내각에서 내놓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박정희 정권에서 보완해가며 경공업 중심으로 수출을 늘려온 대한민국에게 1969년 혹은 1970년대 중반부터 다시 따라잡혔다. 1980년대 산업합리화 조치로 중공업을 축소하면서 남한이 북한을 크게 따돌리기 시작하여 오늘날 그 격차가 수십배에 이르게 되었다.[59]
전후 북한은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60] 한국은 유엔국가들(UN), 미국에서 수십억 달러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61] 북한이 중공업 투자를 활발히 하였고, 인구가 남한보다 적었을 뿐더러 1인당 원조액이 높아서 한동안 북한이 남한을 앞서갔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소련의 붕괴를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로 북한은 더 이상 무상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8. 평가 및 논란
한강의 기적은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여러 논란이 존재한다.
8. 1. 긍정적 평가
한강의 기적은 단기간에 이룩한 놀라운 경제 성장으로, 한국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고 선진국 대열에 합류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초,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 한국은 한국 전쟁의 피해와 미국의 원조 감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도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했지만, 정권 교체로 실행되지 못했다.박정희 정부는 5개년 계획 방식의 계획경제를 도입하고,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 건설을 추진했다. 한일 기본 조약을 통해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해 경제·군사 원조를 받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1964년 수출 1억 달러, 1970년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고, 7년 만인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68] 19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으로 고도성장이 가속화되어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수출 1천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1996년에는 OECD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로 국제 통화 기금의 개입을 받기 전까지 높은 경제 성장을 지속했다.
이 과정에서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주민등록증 발급, 포항제철소 건립, 현대조선 추진, 강남 지역 개발,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 등 여러 개발이 이루어졌다. 특히 서울의 강남 지역과 여의도가 각각 도시와 금융, 비즈니스 중심지로 개발되었다.
정부는 "5개년 개발 계획"과 "새마을운동"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끌었으며, 재벌 중심의 기업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일본과 미국으로부터의 경제 및 기술 원조, 시장 개방, 제조업 발전, 산업 구조 조정 등도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 성장은 한진그룹, 현대그룹, 대우그룹 등 신흥 재벌의 형성을 가져왔다.[31] 대한항공이 민영화되었고,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가 건설되었다.[30] 이러한 정책으로 서울 대도시권으로 인구와 산업이 집중되면서 프라이메이트 시티 현상이 나타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제2의 한강의 기적" 창조를 내걸었으나,[28] 2017년 대통령 탄핵으로 파면되었다.
8. 1. 1. 문재인 정부의 역사 재평가
2017년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오랫동안 지속된 보수 정치의 "적폐 청산"을 내세우면서, 박정희 시대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다.[52][53] 2019년도 초등학생용 사회 과목 교과서(국정)에서 한강의 기적에 관한 서술이 삭제되었고, 국립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던 한강의 기적 관련 전시도 축소할 계획이 세워지고 있다.[52][5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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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통계로 본 대한민국 5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
통계청
[60]
서적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접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1
[61]
웹사이트
http://kosis.kr/stat[...]
[62]
웹사이트
http://theme.archive[...]
[63]
뉴스
경향신문
1966-06-10
[64]
뉴스
경향신문
1966-06-20
[65]
서적
한국경제통사
[66]
간행물
박정희대통령연설문집
[67]
뉴스
경향신문, 매일신문
1965-12-25, 1966-10-01
[68]
뉴스
수출 100억불, 1977년은 「수출 한국」의 또 하나의 출발점
https://www.joongang[...]
1977-12-22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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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 “한국, 과거처럼 ‘안미경중’ 취할 수 없어”···미 CSIS 정책연설 전문
광복 80년, 식민지 폐허에서 세계 경제 10위권 강국으로
한·베트남 정상회담…이 대통령 "매우 중요한 이웃 국가"
‘한강의 기적’, 여주에서 다시 펼쳐지다
[책과 삶] 개발·성장에 잃어버린 한강을 찾아서
‘한강의 기적’ 한국, 더 효율적인 공적개발원조 하려면 [왜냐면]
‘에너지 고속도로’, 그다음은 뭔가 [오동재의 파도를 넘어]
한덕수, 구미 박정희 생가 방문…"경제 기적 첫발을 떼신 대통령"
‘대왕고래’ 허상 좇다 제대로 놓친 ‘AI 월척’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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